성범죄 음주감형 제한 규정, 강제성 없어 있으나 마나

주취범죄 감형금지 법안 논의조차 안돼...사법부 인식 전환 필요


▲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9월 30일 술에 취해 흉기로 아내를 협박하고 성폭행한 40대 남성에게 집행유예와 함께 각각 40시간씩 성폭력과 알코올 치료 수강이 내려졌다. 가해자는 가정폭력으로 피해자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지만 재판부는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른 점을 참작했다고 설명했다.

하루 전인 9월 29일에는 사실혼 배우자의 얼굴과 배 등을 무차별 폭행해 숨지게 한 중국 국적의 40대 남성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가해자도 피해자가 자신의 폭행사실을 신고해 한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18년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하고 범행 직후 119에 신고한 점을 이유로 감형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5세 여아를 자신의 모친 집으로 끌고 갔던 50대 남성도, 회식 후 회사 후배를 강제로 차에 태워 성폭행하려했던 30대 남성도, 청각장애 여성들을 상대로 상습적으로 추행을 일삼았던 60대 남성도 모두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모두 올해 나온 판결들이다.

취중 범죄에 대한 감형을 막기 위한 법안들이 사회와 정치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어 이번 회기 후 자동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2008년 12월 당시 8살 여아를 인근 교회 화장실로 끌고 가 잔인한 방법으로 성폭행했던 조두순은 5년 뒤 출소한다. 조두순은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음이 인정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2년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주취범죄 감형금지 법안들을 잇따라 내놨지만 현재까지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현행 형법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형을 감형하고 있다. 심신미약의 대표적 사유 중 하나가 음주이기 때문에 법원은 그동안 가해자가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음이 증명되면 형량을 낮춰왔다. 다만 조두순 판결 이후 음주감형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자 특별법을 통해 성범죄의 경우 심신미약에 따른 감형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관련법이 개정됐다. 하지만 강행규정이 아니라서 법원의 재량에 따라 여전히 음주감형이 적용되고 있다.


전문가들 음주 심신미약 감경 비판적...이구동성 엄격한 잣대 필요


전문가들은 음주 심신미약 감경 판결에 대해 한목소리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음주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처벌을 하면서 술을 먹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감형해주는 게 합리적인지 의문”이라며 “이번 회기 내 법안들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이 문제가 넘어가는 것인데, 꼭 피해자가 발생해야 부랴부랴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겠지만, 술을 먹었기 때문에 감형을 해주는 법원의 관행은 사람들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술 먹으면 그럴 수 있지’라는 인식이 바뀌기 위해선 법원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신세계로 조인섭 변호사는 “음주로 인해 감형하는 게 정당화되는 범죄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술에 취해서 사기를 쳤다고 볼 수는 없지 않는가”라며 “성범죄에 대한 음주감형이 비난이 더욱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본법인 형법에 심신미약 감형규정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더라도 법원이 감형을 하는 것”이라며 “현재 발의된 법안들이 음주감형을 완전히 배제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이는 기본법(형법)의 예외규정이라서 통과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의원은 아예 모든 강력범죄에 대해 음주감경을 금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특별법 개정 이전에 현재 시행되고 있는 양형규정을 제대로 적용하고 술에 관대한 문화부터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통제력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술을 먹었기 때문에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순 없다”면서도 “지금처럼 음주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는 새로 법을 만든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선적으로 음주감경을 제한하는 특별법과 양형규정이 엄격히 적용될 수 있도록 사법부의 인식전환 및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도 “최근에는 법원에서도 음주 때문에 감형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어 다른 사유들을 들어 감형하고 있는 추세”라며 “몰카 범죄에서도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거나,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거나 성폭력단체에 기부를 한 적 있다는 등의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감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최근 지하철에서 여성의 신체를 5차례나 몰래 촬영한 남성이 벌금형의 선고유예를 받았다. 이에 대해 법원은 초범인 점과 결혼을 앞 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혀 논란이 된 바 있다.

이같은 판사의 재량에 따른 작량감경이든 심신미약에 따른 감형이든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신중히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썬앤파트너스 선종문 변호사는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했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닌데 피해자 입장에서 결과는 같은데 술을 먹은 사람과 먹지 않은 사람이 형량이 다르다는 것은 피해자 보호에 미흡한 점이 분명이 있다”며 “국회가 이 논의를 계속 방치하는 것은 피해자 혹은 국민의 인권 보호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015 여성신문의 약속 ‘함께 돌보는 사회’, 무단전재 배포금지>


1359호 [사회] (2015-10-07)
조나리 기자 (jonr@womennews.co.kr)